웰빙 인생을 누리는 가정

김성호 목사 (Rev. Sungho Kim)
텍사스 기쁨의 교회 담임 

 

잠언 15:13-18
13.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14.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15.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16.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7.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8.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한동안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먹거리 하나를 살 때도 몸에 좋은 유기농 제품을 골라 사고, 전자 제품을 하나 사더라도 전자파가 적은 건강에 해가 되지 않는 것을 골라 사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진정한 ‘웰빙 인생’은 좋은 것을 먹고 마셔서 ‘몸’이 건강해지는 것보다, 먼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13절). 

그렇습니다. ‘웰빙 인생’을 누리려면 우선 마음이 즐거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얼마나 즐거운지 항상 잔치하는 분위기로 산다고 합니다.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15절). 여기서 ‘고난 받는 자’라는 말은,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람, 그리고 심리적으로 크게 억압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하반절의 ‘마음이 즐거운 자’와 연결해 볼 때, 이 빈곤은 물질적 빈곤이라기 보다는 내적인 불안과 슬픔 그리고 조바심으로 인한 빈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 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낯을 찡그리고 살면 세월이 괴롭고 마음이 편하면 하루하루가 잔치 기분이다.

‘행복’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심령이 평안하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웰빙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먼저 마음을 평안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을 평안하게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일들과 상념들로 인해 평안 하려고 해도 평안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 평안과 행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 27). 오직 주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평안–세상은 알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하는–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웰빙 인생을 누리는 가정’의 모습은 어떠한 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웰빙 인생을 누리는 가정에는 사랑을 담기에 힘쓰는 Family Builder들이 있습니다. (가정을 세우기에 힘쓰는 자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밥’만 먹고 산다면, 사람과 동물이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생각만 해도, ‘엔도르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마음에 ‘사랑’을 채울 때, 영육이 건강하게 됩니다.

17절 말씀을 보면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마음에 ‘사랑이 담겨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만 해도, 살진 소를 먹는다는 것은 왕족과 귀족과 부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40여 년 전만 해도 소고기를 마음껏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고기 뷔페에 가서 고기를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풍족한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매일 고기를 먹는 왕족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삶은 불행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가산이 적어서 매일 채소만 먹고 지낼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족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으면, 그 가정에는 진정한 기쁨이 있고 그 곳이 작은 천국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담아야 할 마음에 ‘미움’을 가득 담고 살고 있기 때문에, 병들어 하고 아파하는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아내를, 사랑해야 할 남편을, 그리고 사랑해야 할 자식을 미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움’은 웰빙 인생의 ‘독약’입니다. 아무리 건강에 좋다는 음식을 먹고 기름지고 살진 고기를 배불리 먹는다고 해도, 누군가를 증오하면서 살게 되면 몸과 마음이 병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미움’ 뿐만 아닙니다. 혹시 ‘사랑’을 담아야 할 우리의 마음을 ‘돈’을 담는 자루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돈은 날개를 달고 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없다 가도 생기고 있다 가도 날아가 버리는 게 ‘돈’입니다. 그렇기에 돈을 담는 마음은 언제나 허전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개혁가 칼빈이 ‘물질’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거룩한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없다. 하나님이 마음의 중심에서 쫓겨나면 물질이 그곳으로 들어온다. 마음을 물질이 점령해 버리면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 마음의 주인이 아니시므로 본질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고 마음 속에는 소유하려는, 항상 더 소유하려는 타락한 인간의 욕심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런 사람의 유일한 희망은 더 많이 소유하는 데 있다. 이것을 탐욕이라고 부른다. 탐욕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권위가 사라진다.”

최근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 ‘모멸감’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모멸감’이란, 내 가치가 상대방에 의해 무시되고 박탈당할 때 느끼는 슬픈 감정입니다. 그래서 『모멸감』 이라는 책을 쓴 김찬호 교수는 한국 사회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헝그리’ 사회에서 ‘앵그리’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모멸감’은 ‘앵그리’ 사회를 뒤흔드는 정서적 원자 폭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멸감’을 어디서 가장 많이 느낄까요? 맨 먼저 가정입니다.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평가하는 기준을 ‘돈’에 두고 있습니다. 부모의 능력을 ‘돈’에 두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자녀에게 무시를 당합니다. 그래서 한평생 자녀를 위해 헌신하고도 자식으로부터 ‘모멸감’을 느끼는 부모가 많다고 합니다. 형제들이 모여도 순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돈이 힘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런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그것도 우리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을 그리고 형제 자매를 ‘소유’로 판단하고 차별할 수가 있나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다 행복한 인생은 아닙니다. 16절 말씀에도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 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진정한 웰빙 인생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아름다운 고백을 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 (합 3:18).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은 우리 가족과 우리 믿음의 형제 자매들입니다. 

‘사랑’은 웰빙 인생의 필수 요소입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서로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였습니다(요일 4:18). 사람이 ‘두려움’과 ‘공포’와 ‘모멸감’과 ‘탐욕’에 시달리게 되면, 몸과 마음에 병이 들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사람의 마음과 몸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정말로 복되고 행복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가 머무는 자리자리 마다 ‘사랑’을 채워야 합니다. ‘사랑’을 가득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풍성히 나누기에 힘써야 합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웰빙 인생의 시작입니다. 

 

  1. 웰빙 인생을 누리는 가정에는 감정을 잘 조절하는 Peace Maker들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분노’의 감정을 그냥 방치하게 되면, 우리의 영적인 삶 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강에도 심각한 위협이 됩니다. 18절 말씀을 보니,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다툼’은 웰빙 인생의 장애물이고 큰 적입니다. ‘다툼’이 웰빙 인생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22:24). 분노하는 사람과 가까이하다 보면 쉽게 분노하는 사람이 되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영혼을 ‘올무’에 빠지게 하고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무너뜨리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22:25).

19세기 한 설교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화가 날 때는 열심히 이야기를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평생을 두고 후회할 멋진 명연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휴스턴에 있는 교회로 부임하기 전에, 버지니아에서 살았을 때의 일입니다. Thanksgiving Day를 몇 주 앞두고 저희 아버님께 이런 ‘명연설’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안부전화를 드렸는데, 아버님이 너무 속상하셔서 조용히 전화를 끊어 버리신 적이 있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그러던데 알래스카에 가면 살기가 참 좋다더라.” 알래스카에 가시겠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냥 ‘거기 가면 살기 좋다’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씀하신 건데, 제가 그 말씀을 듣고 뭐라고 명연설을 했을까요? “아버지!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거기가 얼마나 추운데, 친구 분들도 없으시고, 교회는 또 어떻게 하고,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라는 아들의 ‘명연설’에 아버지께서 얼마나 감동을 하셨는지 그만 전화를 끊어 버리셨습니다.

제가 나중에 너무나 속상해서, 그 날 있었던 일을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상담 공부한 목사 맞아요? 아버님이 정말로 알래스카에 가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잖아요. 외로우시니까 그냥 하신 말씀인데…”  듣고 보니 아내의 말이 맞습니다. “아! 그렇지. 내가 왜 그걸 몰랐을까?” 아버지께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차마 다시 전화를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용히 뉴저지 부모님 댁에 가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아들 내외와 손주들을 보며 흐뭇해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뵈면서, ‘우리 아버지가 정말로 알래스카에 가시고 싶었던 게 아니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생각이 깊었더라면, 조금만 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 드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탁월한 ‘분노 관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인생철학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늘 나 자신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려 합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분노 관리의 핵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할 줄 안다는 것은 ‘단지 분노의 감정만을 잘 삭힐 줄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데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Peace Maker’가 되는 것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팔복을 가르치시면서,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사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화평케 하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아가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에 세 아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저희 막내가 저를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막내가 아주 어렸을 때 교회에 가면, 권사님들이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쩜 그리도 아빠를 그렇게 꼭 빼 닮았냐? 붕어빵이야 붕어빵!” 저는 사실 그 말을 들을 때 마다 얼마나 속으로 흐뭇했는지 모릅니다. 정말 우리 막내를 보면, 제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이 나의 모습을 닮아갈 때 얼마나 흐뭇하고 대견스러운지 한번 생각해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실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 얼마나 흐뭇하고 대견스러울까? 매일매일 조금씩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 

우리는 하나님의 ‘붕어빵’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날마다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Peace Lover’ 가 아닙니다. ‘Peace Keeper’ 도 아닙니다. ‘Peace Maker’ 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의 평화를 만드는 일을 누구에게 맡기셨나요? 바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들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자 특권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과 특권을 날마다 누리며 사는 행복한 인생 그리고 은혜의 명가 이루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찬송가 410장 ‘내 맘에 한 노래 있어’가 만들어진 배경을 보면 이렇습니다. 캠프 전도집회에서 찬양으로 섬겼던 피터 빌혼은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에 작사 · 작곡하는 은사까지 받아 가는 곳마다 많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성악가 아이다 D. 디마레스트 여사에게서 이런 요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내 목소리에 알맞은 찬송을 하나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떤 찬송을 원하세요?”
“아, 아무것이나 아름다운 것 (Oh, any sweet piece)이면 돼요.”

피터 빌혼은 ‘sweet piece’ 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어 같은 발음인 ‘Sweet Peace’ 로 후렴을 먼저 작사하고 곡을 붙였다고 합니다.
Peace, Peace, Sweet Peace, 평화, 평화
Wonderful Gift from Above! 하나님 주신 선물!

정말 놀라운 재치를 통해, 찬송가 「하나님의 선물」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김목사님은 어떤 인생을 원하시나요? 어떤 가정을 꿈꾸시나요?” 라고 물으신다면 “Any Sweet Peace from God,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라면, 어떤 평화라도 저는 만족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쁨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평화’를 마음껏 누리시면서, 이 평화를 우리만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Peace Maker ‘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