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교회론: 모달리티와 소달라티의 역사적 역동성

선교적 교회론: 모달리티와 소달라티의 역사적 역동성
(The Historical Transition of the Sodality-Modality Correlation)

안성호 (Gordon College세계기독교학 교수)

 

논문 초록

 

본 논문의 목적은 교회(모달리티)와 선교(소달리티)의 역동성의 역사적 변천을 각 시대별로 고찰함으로써, 선교적 교회론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는데 있다. 교회(모달리티)와 선교(소달리티)의 역사적 관계는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처럼 오르락내리락(up and down)하는 굴곡을 그린다. 즉, 교회와 선교는 연합되다가(AD 1-3세기 초대교회) 교회는 선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AD 4세기), 교회와 수도원 중심의 선교가 조화를 이루다가(AD 5-16세기), 교회가 선교를 멀리하였으며(AD 16세기 종교개혁시대), 다시 교회와 선교회 중심의 선교가 조화를 이루었으며(AD 17-19세기 위대한 세기) 선교가 교회를 초월하다가 (20세기 전-중반) 교회를 중심으로 선교가 이루어지며(20세기 중-후반), 마침내 선교적 교회론이 부상하였다(20세기 후반 이후). 따라서 본 논문을 통해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은, 20세기 말부터 등장한 선교적 교회론은 20세기 초반 영미권 학자들이 제안한 새로운 선교학적 이론도 아니요 선교단체가 살아남기 위해 지역교회를 선교동원하기 위한 자구책도 아니요, 이미 AD 1-3세기 초대교회부터 교회 안에 존재했던 DNA임을 알 수 있다. 즉, 교회와 선교는 초대교회 당시 본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였으나, 각 세기마다 멀어지거나 조화를 이루는 굴곡을 그리면서 변천되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선교적 교회론의 등장과 함께 교회와 선교가 다시 연합을 이루면서 초대교회의 선교적 DNA를 회복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선교적 교회의 모습으로 회귀한다고 볼 수 있겠다.



서 론

 

오늘날 국내외 선교학회의 동향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된 관심사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 예를 들면, 세계기독교의 중심축이 북반구로부터 남반구(from the Global North to the Global South)로 이동하는 사실, 미전도지역(unreached area)으로부터 이동하는 복음의 자유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는 이주민들을 위한 디아스포라 선교, 그리고 선교적 교회론(Missional Church)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세번째 주제인 선교적 교회론에 관한 다양한 논문과 저술이 출판되고 있다. 이 선교적 교회론은 하나의 선교학적 그리고 신학적 이론이기도 하지만, 하강하는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을 회복시키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으로도 볼 수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 선교학자이자 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선교학 교수였던 랄프 윈터(Ralph Winter)는 북미와 세계교회들을 선교동원하기 위해서 선교학 교수를 사임하고 Pasadena에 USCWM(US Center for World Mission)를 세운다. 그리고 1973년 8월 서울에서 열린 All-Asian Mission Consultation(Asia Missions Association의 전신)에서 윈터는 ‘두 가지의 구조(The Two Structure)’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지역교회인 모달리티(Modality)와 선교단체인 소달리티(Sodality)의 두 구조가 모두 필요하며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1세기 초대교회부터 21세기 오늘날까지 교회(Modality)와 선교(Sodality)의 관계가 어떻게 변천되었는지 고찰함으로써 ‘선교적 교회론’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연구질문(Research Questions)을 제시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20세기에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egin)이나 대럴 구더(Darrel Guder)와 같은 영미권의 선교학자들이 고안한 새로운 선교이론인가 아니면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론일까? 만일 선교적 교회론이 20세기 이전부터 존재했다면 그 역사적 기원은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일까? 본 논문에서 필자는 선교적 교회론은 201세기 영미권 학자들이 개발한 새로운 선교이론이 아니라 1세기 교회와 선교가 연합되었던 초대교회의 본질적 모습이었으며, 이러한 교회와 선교 간의 관계가 각 역사마다 변천되다가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초대교회의 선교적 교회론의 모습을 회귀한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 AD1-3세기: 교회(모달리티)와 선교(소달리티)의 연합 – Church in Mission

 

1-3세기 초대교회는 교회와 선교가 연합을 이룬 전형적인 선교적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즉, 초대교회의 본질은 선교 그 차제라 할 수 있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선교적 열정을 기록하고 있다. 1세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공동체(Disciples Community)는 곧 타문화권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한 선교적 공동체(Cross-cultural Missional Community)였다. 예수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다문화적 교차로라고 할 수 있는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많은 사역을 했고, 유대인들의 관점으로 볼 때 이방인의 지역이자 타문화권 지역인 북쪽의 두로와 시돈 그리고 갈릴리 우편의 데가볼리(Decapolis) 지역을 제자들과 함께 수시로 방문해서 사역하였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기 전 제자들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서서 모든 민족(all the nations)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당부한다. 

사도행전 2장에서 누가는 우리들에게 오순절 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던 120명의 제자공동체 역시 선교적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오순절 때 성령이 이 제자공동체에 임하자 이 공동체는 선교적 공동체로 급변한다. 그래서 다양한 타문화권 지역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유대인들에게 “난 곳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이 때 복음을 들은 수많은 유대인들은 자기 고향으로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구레네, 리비아, 로마, 그레데 그리고 아라비아) 돌아가서 선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제자공동체는 예수가 승천한 후에 대부분 타문화권 선교사가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남인도에서, 안드레는 스구디아에서, 요한은 에베소에서, 빌립은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에서, 마태는 이디오피아, 파르티아, 페르샤에서,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시리아에서, 다대오는 에뎃사에서, 열심당원 시몬은 페르시아 등지에서, 그리고 수제자인 베드로는 로마에서 선교를 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서 순교하였다.

사도행전 8장과 11장을 살펴보면 스데반의 순교 이후 큰 박해로 인해 흩어진 유대인들은 유대, 사마리아, 베니게,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까지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역을 했다. 그리고 이 흩어진 자들 중에서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온 유대인들은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바나바 그리고 바나바가 다소에서 데려온 사울의 리더십을 통해 안디옥교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이 공동체는 유대교 공동체(Jewish Community)과는 구별되었기 때문에 안디옥 공동체는 주변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컫음을 받게 된다. 

사도행전 13장부터 살펴보면 안디옥 교회 역시 명백한 선교적 교회였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이끌고 갈릴리 아람어(Aramic)를 사용하였던 예루살렘 교회가 주로 유대지역을 대상으로 내국선교(domestic mission)를 하였다면, 다문화적이고 헬라어를 사용한 안디옥 교회는 로마제국의 타문화권선교를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안디옥 교회는 핵심리더인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이 팀은 소아시아 지방과 유럽지역에서 타문화권 선교사역을 한다. 

랄프 윈터에 의하면 안디옥 교회는 모달리티(Modality)와 소달리티(Sodality)의 양면성이 융합되어 있었다. 즉, 지역교회이자 모달리티(Modality)인 안디옥 교회는 소달리티(Sodality)인 바울의 선교단을 파송하였다. 그러자 바울의 선교단은 소아시아 그리고 유럽지역을 순회하면서 지역교회(Modality)를 세운다. 즉, Modality(안디옥 교회)는 Sodality(바울의 선교단)를 태동했고, Sodality(바울의 선교단)는 선교현장에서 Modality(지역교회)를 태동한다. 그리고 Sodality(바울의 선교단)가 세운 Modality(지역교회)는 또 다시 Sodality(선교단)을 파송하는 Missional Modality(선교적 교회)가 된다. 그 한 예를 들어보자. 사도행전 19:8-10을 살펴보면 선교사 바울은 2년 동안 에베소에서 머물면서 두란노에 홀을 세워서 제자들을 양육하였다. 그 결과 이 제자들은 소아시아 지역에 선교사로 가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7개의 초대교회와 또 다른 교회를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골로새 지역을 다녀간 기록을 발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골로새서 1:1-8장을 살펴보면 그의 제자인 에바브라가 골로새 지역의 선교사로 가서 골로새 교회를 세웠고 나중에 바울이 얼굴을 보지 못한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서신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골 2:1). 

AD 2-3세기가 접어들면서 여러 로마황제들의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있었지만 초대교회는 선교를 멈추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요인들로 인해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이라는 플랫폼(platform)을 통해서 더욱 효과적으로 선교를 할 수 있었다. 첫째, 로마제국은 제국 전체에 많은 도로를 건설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이 도로를 통해서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둘째, 로마제국의 안정된 치안력은 선교사들이 제국 내에서 이동할 때 강도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막강한 해군력은 지중해를 항해하는 선교사들의 배를 해적선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셋째, 로마제국은 공용어로 헬라어(Greek)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로마제국 내 다양한 민족들은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많은 시간을 들여서 각 민족들의 방언을 배울 필요없이 헬라어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또한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갈릴리 아람어로 말한 사건들을 헬라어로 기록하였다. 또한 히브리 언어로 기록된 구약성경도 BC 3세기경 헬라어의 70인역(LXX)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다양한 민족들은 공용어인 헬라어로 기록된 신구약 성서를 통해 기독교를 접할 수 있었다. 넷째, 로마정부는 비교적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하여 관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2-3세기 초대교회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효과적으로 선교사역을 할 수 있었다. 아울러 2-3세기 초대교회의 선교사들은 로마제국을 넘어서서 파르티아, 아프리카 북부의 에디오피아, 아일랜드, 인도 그리고 중국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1-3세기에 초대교회의 본질은 선교적 교회였으며, 교회(Modality)와 선교(Sodality)는 완벽한 연합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 AD 4세기: 교회(모달리티)는 선교(소달리티)를 필요로 하지 않음 – Church doesn’t need Mission)

 

4세기에 로마제국은 기독교 제국이 되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교회는 선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AD 312년 콘스탄틴(Constantine)은 자신의 정적 로마의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제압 한 후 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다.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Helena)는 동방으로부터 온 헬라어를 구사하는 기독교인이라 전해진다. 이러한 모친의 영향으로 인해 콘스탄틴은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AD 313년 콘스탄틴은 로마제국 내 기독교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는 밀라노 칙령(Edict of Millano)를 선언한다. 그리고 콘스탄틴 자신은 그의 친구 니코데미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으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AD 323년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등극한다. AD 370년 콘스탄틴은 마침내 로마제국이 기독교제국(Christendom)임을 선언하였고 로마제국의 모든 백성들은 교회에 참여할 것을 법령으로 제정한다. 그 결과 로마제국 내 많은 민족들이 기독교화되고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됐다. 그리고 로마제국은 기독교제국이 됐고 로마제국의 백성은 모두 기독교인이어야만 하였기에 사실상 교회는 선교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 교회는 선교를 멈추지 않았고 로마제국을 넘어서서 메소포타미아의 에뎃사, 아르메니아, 중동의 아라비아, 아프리카 북부의 에디오피아, 유럽의 독일, 영국의 아일랜드, 인도 그리고 중국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칙령 이후 로마제국의 교회는 제도화되고 타락하면서 자연히 선교적 동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이 당시 교회들은 로마제국의 영토를 넘어선 선교적인 노력이 어느 정도 있긴 했지만, 로마제국은 기독교제국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교회는 선교를 할 필요가 없었다.


  • AD 5-16세기: 교회(모달리티)와 선교(소달리티)가 조화를 이룸 – Church and Mission in Harmony

 

이 세기에 교회와 선교는 조화를 이루었다. 왜냐하면 교회(Modality)는 수도원(Sodality)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선교운동을 펼쳐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시기에 수도원은 – 켈틱, 어거스틴, 네스토리안, 프란체스탄, 도미니칸, 예수회 등등 – 선교운동을 주관하는 선교센터(Sodality) 역할을 하였다. 

첫째, 5세기 켈틱 수도원(Celtic Monastery)과 어거스틴 수도원의 선교운동을 살펴보자. 5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제국은 서서히 쇠퇴하면서 북쪽으로부터 바이킹과 게르만족과 같은 야만족으로부터 침략을 받는다. 더욱이 1054년 로마제국은 마침내 신학적, 문화적, 정치적인 차이로 인해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서로마제국은 야만족에 의하여 동로마제국은 이슬람에 의하며 멸망당한다. 연쇄적 반응으로 동서로마제국의 교회 역시 쇠퇴하면서 선교의 열정과 동력을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교회는 선교운동을 멈추지 않고 로마제국 영토를 넘어서 야만족을 향하여 선교사를 파송한다. 특별히 5세기 초 패트릭(Saint Patrick)의 선교에 의하여 아일랜드에 세워진 켈틱교회의 수도원(Celtic Monastery)은 선교운동의 중심지였고 여러 수도승(Monk)들을 선교사로 파송 하였다. 예를 들면 쿨룸바(Columba 550-615)는 스코틀랜드로 진출했고, 기타 수도승들을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과 같은 북유럽, 러시아 그리고 바이킹이 거주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진출해서 선교사역을 했다. 596년 서로마제국의 교황 그레고리(Pope Gregory the Great)는 어거스틴(Augustine)과 베네딕트(Benedictine) 수도원의 수도승 40명을 잉글랜드로 파송한다. 이들은 잉글랜드 남부의 켄터베리에 교회를 세웠고 어거스틴 스스로가 최초의 켄터베리 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로 세워진다.

둘째, 5-6세기 네스토리안 수도원의 선교운동을 살펴보자. 4-6세기 교회협의회는 삼위일체 논쟁으로 들어간다. 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그 결과 431년 에베소서 공의회(Ephesian Council)에서 네스토리우스은 파면을 당해서 로마제국으로부터 쫓겨난다. 네스토리안(Nestorian)이라 불리는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들은 네스토리안 수도원(또는 시리안 수도원)을 세우는데 이는 교회역사상 가장 선교적인 교회 중에 하나가 된다. 파면 이후 네스토리안 수도원은 로마제국의 지역 내에서 더 이상 사역할 수가 없었기에 동방지역으로 진출해서 교세를 확장하려고 한다. 네스토리안 수도승들은 시리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그리고 당조 시대의 중국과 일본까지 진출을 하며, 그들이 가는 곳마다 네스토리안 (혹은 시리안) 교회를 세운다. 네스토리안 선교사 알로펜(Allopen)은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AD 635년 당조 시대의 중국에 도착하며 태종 황제의 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당나라의 수도이자 실크로드의 종착역인 씨앙(長安)에 네스토리안 기념비를 세웠는데, 1635년 이 기념비가 발견되었다. 씨앙에 알로펜은 네스토리안 수도원을 세웠고 21명의 수도승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네스토리안 수도원은 중국 내 약 10개의 지역까지 확장되었고 약 100개의 도시에 네스토리안 수도원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셋째, 12-14세기 로마카톨릭의 프란체스칸(Franciscan) 수도원의 선교운동을 살펴보자. 이 수도원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동방지역에 수도승들을 선교사로 파송한다. 1246년 11월 17일 플라노 카피니의 존(Father John of Plano Carpini)은 몽골제국에 도착한다. 1275년부터 1291년 동안 마르코 폴로(Marco Polo)와 그의 사촌들은 동방지역인 중앙아시아와 중국으로 탐험여행을 하면서 동방견문록을 저술한다. 1266년 마르코 폴로 여행단은 몽골제국의 황제인 쿠빌라이 칸(몽골제국의 창설자 징기스칸의 손자)을 접견한다. 이 때 쿠빌라이 칸은 기독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로마카톨릭 교회에게 100명의 기독교 교사를 몽골제국으로 보내달라는 전문을 마르코 폴로 여행단을 통해서 교황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로마카톨릭 교회는 이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다가, 그로부터 20여년 후 1289년 교황 니콜라스 6세는 2명의 선교사를 몽골제국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한다. 그 중에 한 명인 존 몬테코비노(John of Montecorvino)는 인도를 거쳐서 1294년 몽골제국에 도착해서 티무르 칸의 환영을 받는다. 존 몬테코비노는 1294년부터 1328년까지 약 30여 년간 몽골제국에서 선교사역을 하였고 약 6,000여명의 몽골인들에게 영세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존 몬케코비노는 1308년 교황 클레멘트 5세에 의하여 파송된 3명의 프란체스칸 선교사에 의하여 중국 로마카톨릭교회의 최초의 주교로 세워진다. 존 몬테코비노 사망 이후, 존 마리지놀리(John of Marignolli)를 포함한 32명의 프란체스칸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몽골제국의 수도인 뻬이징에 도착해서 사역했다. 1368년 몽골제국은 명나라에 의하여 중국에서 축출된다. 그 결과 중국 로마카톨릭교회의 마지막 주교인 존 플로렌스(James of Florence)가 1369년 명나라로부터 추방되면서 라틴계 로마카톨릭 교회는 사실상 중국으로부터 모두 철수하게 된다. 또한 13세기 프란체스칸 수도원의 룰(Ramon Llull: 1232-1315)은 동로마제국의 대적이었던 이슬람의 사라센 제국까지 찾아가서 선교사역을 했다. 

넷째, 15-16세기 로마카톨릭교회의 예수회 선교회의 선교운동을 살펴보자. 1534년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프란세스 사비에르에 의하여 설립된 예수회 선교회(Society of Jesuit)는 가장 선교적인 교회 중에 하나였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현장의 문화와 종교에 대하여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적응론적 선교방법(accommodation)에 의하여 괄목할만한 선교사역을 한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인도의 로베르토 지노빌리(Robert de Nobili: 1577-1656), 일본의 프란시스 사비에르 (Francis Xavier: 1506-1552), 중국의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1552-1610) 그리고 인도차이나 지역의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였던 알렉상드르 드 로드 (Alexander de Rhodes: 1591-1660)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중국의 마테오 리치는 중국 유교학자의 관점에서 효과적으로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천주실의(天主實義: The True Meaning of the Lord of Heaven)를 저술하였다. 여기서 리치는 Deus(the Latin name of God)를 중국유교경전 사서오경(四書五經)에서 최고존재로 묘사되는 쌍띠(上帝: the Lord of Heaven)로 번역하였는데, 그 이유는 쌍띠와 Deus는 유비적으로 대응하는 접촉점(point of contact)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리치는 중국의 조상전례를 우상숭배가 아닌 조상들에 대한 존경의 의례이자 문화(civil right)로 해석함으로써 중국인 신자들의 조상전례를 허용하였다.

그러므로 이 세기에 수도원은 선교운동의 중요한 센터역할(Sodality)을 하였으며, 교회는 수도원과 선교회를 중심으로 해외선교운동을 이루어나갔기 때문에 교회와 선교는 조화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 16세기 개신교종교개혁시대: 교회(모달리티)에 선교(소달리티)는 존재하지 않음 – Church without Mission

 

16세기 초 북유럽대륙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루터,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 프랑스 제네바에서는 칼빈,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빈의 제자였던 존 녹스 등에 의하여 개신교 종교개혁이 발생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유로 인해 16세기 개신교회(Protestant Church)의 선교적인 노력은 다른 시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미미했던 것으로 평가한다.

첫째, 내부적인 이유로서는 종교개혁가들이 선교신학을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의 선교신학자 Gustav Warnec은 종교개혁가들은 “선교의 행위(missionary action)뿐만 아니라 선교의 아이디어(the idea of mission)도 결여됐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근본적인 신학적 관점은 그들이 선교적 행위를 취하는데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라고 평가했다. David Bosch와 Paul Pierson은 종교개혁가들의 교회론(ecclesiology)를 살펴보면 선교에 대한 강조가 결여됐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이 설립한 세 가지 신조 – 1530년 루터교의 Article VII of Augsburg Confession, 1559년 French Confession, 그리고 1561년 Belgic Confession – 를 살펴보자. 종교개혁가들은 이 신조들을 통해서 교회의 세 가지 필수적인 요소를 – “말씀선포(the Word), 성례(the Sacramento) 그리고 치리(the Exercise of Discipline)” – 주장하지만 선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선교신학자들은 칼빈, 루터 그리고 동시대의 다른 종교개혁가들은 선교에 대하여 강조하였다고 상반되게 주장한다.

둘째, 개신교는 로마카톨릭의 탄압 가운데 생존해야 했기 때문에 해외선교를 시도할 여지가 없었다. 로마카톨릭의 탄압에 반발하여 개신교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인다. 그 결과 1618년부터 1648년 동안 중부유럽에서 개신교와 로마카톨릭 간에 30년 전쟁이 발생한다. 1648년 이 전쟁은 양측 간에 웨스트발리아 평화조약(the Peace of Westphalia)이 맺어짐으로써 종결되고, 개신교는 로마카톨릭의 핍박 가운데서 살아남게 된다. 하지만 1685년 교황 루이스 15세는 프랑스에서 위그노라 불리는 개신교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낭트조약을 파기시키면서 끊임없이 개신교도를 탄압한다.

셋째, 북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은 해외선교를 위해서 신대륙으로 진출할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북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이 신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Route가 있었다. 하나는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통과하는 육로, 또 다른 하나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북미와 중남미로 향하거나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순회하는 해로였다. 그러나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역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같은 이슬람 세력이 장악했기 때문에 육로는 막혔다. 따라서 개신교 국가는 해로를 개척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한 로마카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대륙으로 향하는 대부분의 해로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개신교 국가의 해군력은 현저한 열세에 처해있었다. 그나마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 잉글랜드가 동인도회사(East Asian Company)라는 무역회사를 통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약간의 해양무역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북유럽의 개신교 국가는 해외선교를 위하여 신대륙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넷째, 선교를 주관하는 중앙통제기관이 있었던 로마카톨릭과는 달리 개신교회는 이러한 중앙통제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로마카톨릭보다 선교적 노력이 약했다. 

그러므로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개신교회(Modality)는 살아남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다른 시대보다 상대적으로 선교(Sodality)에 대한 노력이 약했다고 볼 수 있다.


  • 17-19세기: 교회(모달리티)와 선교(소달리티)가 조화를 이룸: 선교단체가 선교를 주관하고 교회는 선교단체에 선교를 위임함 – Church and Mission in Dichotomy: Mission by Mission Society

 

저명한 선교역사학자 케넷스 라투렛이 언급한 것처럼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개신교회 안에는 가장 활발하게 선교운동이 일어났기에 이 시기를 개신교 선교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고 일컫는다. 이 시기의 특징은 많은 선교회 (혹은 선교단체: Mission Society: Sodality)가 탄생하고, 교회는 선교운동을 선교회에 위임하고 선교회가 선교운동을 주관하게 된다. 즉, 교회와 선교단체 간에 분업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 17-18세기 경건주의의 할레대학, 덴마크-할레 선교회 그리고 모라비안 선교운동

 

이 시기에는 독일 루터교의 경건주의자들이 건립한 할레대학, 덴마크-할레(Dennis-Halle) 선교회 그리고 모라비안 선교운동과 같은 선교단체들이 열정적인 선교운동을 주관하였으며, 교회와 선교와 조화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할레대학을 살펴보자. 17-18세기에 접어들면서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의 열정을 많이 상실하였고 스콜라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아서 이성과 교리에 전념하게 되며, 상대적으로 선교에 대하여 무관심해진다. 하지만 17세기 말 독일의 Lutheran 교회들 중에서 필립 스페너 (Philip Jacob Spener: 1635-1705), 어거스트 프랑케 (August Hermann Franke: 1663-1727), 그리고 진젠도르프 등을 중심으로 교리가 아닌 체험과 회심을 중요시 여기는 경건주의(Pietism) 운동이 일어난다. 1692년 경건주의 운동의 리더들은 할레(Halle) 대학을 설립해서 경건주의 사역자와 선교사들을 양성하였다. 

둘째, 덴마크-할레 선교회를 살펴보자. 1620년부터 덴마크는 인도의 남동부 트랑케바르(Tranquebar) 지역에 무역을 위한 식민지를 개척한다. 1705년 덴마크 국왕 Frederick 4세는 코펜하겐의 궁중사목인 (royal chaplain) 프란즈 루켄즈(Dr. Franz Lutkens)에게 덴마크 식민지인 Tranquebar지역으로 파송할 선교사를 찾으라고 명한다. 루켄즈는 덴마크 내에서 마땅한 선교사를 찾지 못하자, 독일의 할레대학에 있는 경건주의운동의 리더들을 방문한다. 그래서 할레대학과 함께 덴마크-할레 선교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할레대학에서 훈련을 받던 지겐바르크 (Bartholomaus Ziegenbalg: 1683-1719)와 플루차우(Heinrich Plutschau: 1678-1747)를 트랑케바르 지역의 선교사로 파송한다. 18세기까지 Dennis-Halle 선교회는 약 6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한다.

셋째, 모라비안 선교운동을 살펴보자. 경건주의 운동은 모라비안과의 만남을 통해 모라비안 해외선교운동으로 전개된다. 종교개혁가 존 후스의 추종자였던 모라비안들은 보헤미안 지역에 거주하였다. 하지만 30년 전쟁 이후 로마카톨릭이 탄압하자 그들은 보헤미안으로부터 독일의 색소니로 이주해서 경건주의 운동의 리더 중에 한 명인 진젠도르프를 만난다. 모라비안들은 진젠도르프가 제공한 헤른후르트(Herrnhunt: the Lord’s watch) 마을에서 정착하였고, 진젠도르프의 인도 하에 모라비안 해외선교운동이 시작된다. 그 결과 1732년부터 1760년까지 226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파송되며,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안 선교운동의 아버지라 일컫게 된다.

 

  1. 18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위대한 세기)

 

이 시기에는 교회가 선교회나 교단선교부에 선교를 위탁하는, 즉 선교회와 교단선교부가 선교를 주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랄프 윈터는 이 선교운동의 위대한 세기를 “세 시대”로 구분한다. 첫째, 해안선을 중심으로 선교가 이루어진 해안선교시대(윌리암 케리), 둘째 중국 내륙을 중심으로 선교가 이루어진 내지 선교시대(허드슨 테일러), 마지막으로 국경이 아닌 종족(ethnic group)를 중심으로 선교가 이루어진 미전도종족시대(카메론 타운젠트와 도날드 맥가브란)로 구분한다. 그러면 윈터의 세 시대 구분에 준거하여 교회와 선교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살펴보자. 

첫째 해안선교시대(Coastland Mission)를 살펴보자. 이 시대에는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이자 해안선교시대의 문을 연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여겨지는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 1761-1834)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많은 선교회가 탄생하며 이들이 선교운동을 주관한다. 당시 유럽의 개신교회들은 전반적으로 극단적 칼빈주의의 예정론(predestination of hyper-Calvinism)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 결과 교회들은 해외선교를 위하여 노력하지 하지 않게 된다. 1792년 5월 30일 잉글랜드의 노팅햄에서 열린 잉글랜드 침례교사역자 총회에서 케리는 극단적 칼빈주의를 탈피해서 적극적인 해외선교를 시도할 것을 주장한다. 같은 해 케리는 ‘이교도의 회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이라는 저명한 논문을 작성했는데, 특히 이 논문에서 효과적인 해외선교를 위해서 선교회(missionary society)를 조직할 것을 당부한다. 이러한 케리의 제의로 인하여 잉글랜드 침례교 선교회가 조직되고, 1793년 6월 케리는 잉글랜드 침례교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1793년 11월 11일 인도 남부의 세람포(Serampo)에 도착한다. 이 후 약 38여년 간(1793-1834) 케리는 세람포의 3인이라 불리는 Joshua Marshman (1768-1837) 그리고 William Ward (1764-1823) 함께 사역을 하게 된다. 이러한 케리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18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많은 선교회가 조직이 되며 이 선교회는 해외선교운동의 주역이 된다. 예를 들면, 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 Scottish and Glasgow Missionary Society (1796), 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 Religious Track Society (1799),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1804),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1810), American Baptist Missionary Union (1814), American Bible Society (1816), Berlin Society (1824) in Germany, Basel Mission (1815) in Swiss, Demark in 1821, France in 1822, Sweden in 1835 and Norway in 1842 등과 같은 선교회가 조직된다. 

1802년 미국 동부 메사스추 주에 소재한 윌리암스 대학(Williams College)에서 사무엘 밀즈(Samuel J. Mills 1783-1818)를 중심으로 5명의 대학생에 의하여 건초더미 기도운동(Haystack Prayer Movement)이 일어나며, 이 운동은 해외선교운동으로 발전된다. 이 대학생들은 회중교회가 자신들을 파송해줄 수 있는 선교회를 결성해줄 것을 탄원한다. 그 결과 1810년 6월 28일 메사스추세츠 주에서 열린 미국회중교회총회에서 ABCFM(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이라는 선교회를 세웠다. 1812년 2월 19일과 2월 24일 두 번에 걸쳐서 ABCFM은 아도니람 저드슨을 포함해서 최초의 5명의 미국개신교선교사를 인도로 파송하였고, 이후 1816년에는 실론, 1820년에는 중동, 1830년 중국 그리고 1834년 인도 마두라로 계속해서 선교사를 파송한다. 1814년 5월 미국 침례교 신자였던 아도니람 저드슨의 탄원으로 인해 미국침례선교회(American Baptist Foreign Mission Society)라는 교단선교회가 결성됐고, 이 선교회는 지속적으로 침례교 선교사들을 파송한다. 

둘째, 내지선교시대(Inland Mission)를 살펴보자. 이 세대에도 내륙선교를 위한 여러 선교회가 – 중국내지선교회, 수단내지선교회 그리고 아프리카 내지선교회 – 조직되는데, 특히 재정의 공급을 주님께만 의지하는 믿음선교회(Faith Mission Society)가 탄생한다. 1854년부터 1860년까지 중국의 선교사로 사역하던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 1832-1905)는 건강의 악화로 인해 잉글랜드로 귀국한다. 테일러는 중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서구권 선교사들이 자국의 군사력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 남동부 해안지방의 항구도시 – 상해, 마카오, 홍콩 등등 – 에 집중적으로 몰려있지만, 상대적으로 내륙지방에 거주하는 선교사는 전무하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그래서 1865년 테일러는 초교파이자 Faith Mission단체인 중국내지선교회(CIM: China Inland Mission)를 조직해서 중국의 내륙지방의 선교에 주력한다. 이러한 CIM의 영향을 받아서 내륙선교를 위한 아프리카내지선교회(AIM: Africa Inland Mission) 그리고 수단내지선교회(SIM: Sudan Inland Mission; 현재는 Serving International Mission)등이 조직되기도 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북미에서는 학생자원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이라는 대학생 선교운동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1886년 1회 SVM선교대회가 열린 때부터 1945년까지 약 20,500명의 북미 대학생들이 SVM을 통해서 선교사로 파송된다. 이들은 영국,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아공을 포함한 전세계 지역으로 진출한다. 1882년 잉글랜드 케임브리지 대학의 7명의 학생들은 (케임브리지 7인) D. L. Moody의 순회전도를 통해서 CIM 선교사로 헌신한다. 이들은 중국으로 가기 전에 영국과 북미를 순회하면서 대학생들을 선교동원하였고, 이들의 영향력으로 미국에서는 SVM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즉, SVM이라는 선교회는 그 당시 선교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셋째, 미전도종족 선교시대(Unreached Mission) 역시 여러 선교단체가 탄생한다. 1917-1918년 Los Angeles Bible House의 후원으로 과테말라에서 스페인어 성경을 판매하던 카메론 타운젠트(William Cameron Townsend: 1896-1982)는 Cakchiquei라는 부족을 만났는데, 그들은 스페인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문자로 기록된 언어가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그래서 타운젠트는 국가선교(state missions)이 아닌 종족선교(ethnic missions)의 필요성과 성경을 그 종족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1934년 타운젠트는 Camp Wycliffe를 창설해서 성경번역선교사를 훈련시켰고, 멕시코에서 성경번역사역을 시작했다. 이 단체는 성경번역선교회 (WBT: Wycliffe Bible Translator) 혹은 SIL(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로 발전된다. 이 단체는 성경을 미전도종족의 방언으로 번역하는데 주력한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세기에서 교회는 선교를 선교회에 위임하였고 선교회가 선교를 주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선교회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 교단에서 세운 교단선교부(denominational mission society)가 있었다. 예를 들면 영국성공회(Anglican Church)가 만든 CMS(Church Missionary Society)와 SPG(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미국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에서 만든 ABCFM(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그리고 미국북장로교가 만든 FMB-PCUSA(Foreign Mission Board of Presbyterian Church of the USA)등이 있었다. 둘째는 초교파적이고 독립적인 faith mission선교회가 있으며 CIM (OMF), WEC, SIM 그리고 WBT 등이 그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교단선교회가 지역교회(Modality)에 속하느냐 아니면 선교단체(Sodality)에 속하느냐라는 문제는 논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교단선교회 역시 교회에서 선교를 위임 받았기 때문에 선교단체로 포함시키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세기에는 교회가 선교를 선교회에 위임하였고(Church and Mission in Dichotomy) 선교회가 선교를 주도(Mission by Mission Society)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 20세기 전-중반: 교회(모달리티)를 초월한 선교(소달리티) – Mission beyond Church: Missio Dei

 

중세 계몽주의 때부터 서구기독교는 신 중심적(theology-centric) 사상으로부터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중요시하는 인간 중심(anthropo-centric)의 사상으로 기울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외선교 역시 신이 주도하기 보다는 인간의 노력을 중요시하는 성향을 띄게 된다. 즉, 서구선교사들은 선교지의 미개한 현지인들을 교육을 통한 계몽화(enlightenment)와 서구 문명을 통한 문명화(civilization)에 주력했다. 

하지만 20세기 전반부터 유럽의 선교신학자들은 선교는 교회를 초월해서 신이 스스로 주도한다는 Missio Dei(Mission of God)개념을 제의하기 시작했다. 1932년 Brandenburg Missionary Conference에서 칼 바르트(Karl Barth)는 ‘선교는 하나님의 행위 (Actio Dei: God’s Action)’이라고 제의했고, ‘교회는 선교의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본질상 선교다(church does not do mission but is mission)’라고 주장했다. 1934년 독일의 선교신학자 칼 할텐슈타인(Karl Hartenstein)은 바르트의 신학을 근거로 Missio Dei 개념을 최초로 제의했다. 1952년 7월 5-17일 독일의 빌링겐(Willingen)에서 열린 IMC(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대회에서 할텐슈타인은 자신이 저술한 IMC대회의 보고서 “신학적 각성(Theologische Besinnung)”에서 Missio Dei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제의하였고, 독일의 Lutheran 선교신학자 게오르그 비체돔(Georg F. Vicedom)은 Missio Dei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고 1952년 WCC대회의 전도부 총무이자 네덜란드의 선교신학자 요하네스 호켄다이크(Johannes D. Hoekendiijk)는 1952년 IMC대회에서 Missio Dei개념을 더욱 정교히 하여서 교회중심적 선교(Church-centered Mission)보다 하나님 중심적 선교(God-centered Mission)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들이 주장하는 Missio Dei의 핵심적인 개념은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은 선교의 주체이다. 즉, 성부 하나님 자신은 성자를 파송하였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파송해서 스스로 선교를 행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초월해서 스스로 선교를 행하시며 그의 교회들이 선교에 동참하도록 초청하시고 도구로 삼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를 초월해서 세상과의 Shalom을 원하신다. 다시 말해서 Missio Dei 개념은 교회중심적 선교(God-Church-World)보다는 하나님 중심적 선교(God-World-Church)을 주장한다.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동한 WCC(World Church Council: 세계교회협의회)는 이러한 Missio Dei 개념을 그 토대로 하고 있다. 즉, WCC는 교회의 사역을 초월한 사역, 즉 사회참여와 정의구현을 위한 모든 사역들도 선교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20세기 중반 나타난 Missio Dei개념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를 초월해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 20세기 중반 이후: 교회(모달리티)중심의 선교(소달리티) – Church-centered Mission

 

20세기 중반부터 복음주의 진영은 이러한 Missio Dei 개념에 반발하여서 교회가 선교의 도구라기보다는 선교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교회중심의 선교개념(Church-centered Mission)을 강조하였다. 1960년 대에 복음주의자들은 효과적인 해외선교를 위해서 Inter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Evangelic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그리고 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을 조직하였고 마침내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로잔세계선교위원회(LCWE: Lausanne Committee on World Evangelization)를 결성한다. 로잔위원회에서는 한편으로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모두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전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으며 선교의 중심은 교회가 되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로잔위원회에서는 북위 10도와 40도 내에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거주하는 미전도종족이 밀집되어 있음을 주목하고 (10/40 Window), 이 미전도종족 안에 교회가 세워질 때까지 기존의 기독교화된 교회들이 한 미전도종족을 입양하자는 미전도종족 입양운동(Adopt A People)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도의 선교사였으며 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교회성장학 교수였던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 1897–1990) 은 1970년대부터 ‘선교란 교회의 숫적인 성장을 의미한다’라는 교회성장학(Church Growth)을 제안함으로써 교회 중심의 선교를 역설하였다. 또한 맥가브란은 자신의 인도 선교사역의 경험을 토대로 효과적인 교회성장과 관련된 동질성집단(homogeneous unit)과 People Movement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20세기 중반 이후 복음주의권에서는 교회 중심의 선교를 지향하게 되었다.


  • 20세기 후반 이후: 선교적 교회론: 교회(모달리티)와 선교(소달리티)의 융합 – Church in Mission: Missional Church)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영미권에서는 선교적 교회론이 대두된다. 저명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레슬리 뉴비긴은 약 40여년동안 남인도 마두라에서 사역을 하면서 Church of South India라는 에큐메니칼 교회를 조직한다. 이 후 인도에서 선교사역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사실상 선교지는 기독교가 쇠퇴해가는 영국을 포함한 서구권 국가임을 통감한다. 그래서 뉴비긴은 영국교회가 선교적 동력을 회복하는 선교적 교회가 되어서 영국을 선교할 수 있도록 GOC(Gospel Our Culture)라는 네트워크를 조직하며, 90세로 소천할 때까지 교회와 선교에 관한 많은 저술을 작성한다. 특히 뉴비긴은 1961년 뉴델리에서 열린 WCC대회에서 WCC와 IMC가 통합하여 CWME (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을 세울 때 큰 공헌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뉴비긴과 GOC의 영향을 받아서 북미의 선교학자들도 기독교가 쇠퇴해가는 북미 역시 선교지라고 자각한다. 그래서 북미교회의 선교적 동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1996년 Graig Van Gelder, Darrel Guder, Alan J. Roxburgh, Alan Hirsch 그리고 George Hunsberger를 중심으로한 북미의 선교학자들과 교회리더들은 GOCN(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를 조직한다. 이들은 3년 간의 연구 끝에 다양한 논문을 작성하였고, 1998년 Guder는 이 논문들을 편집하여서 ‘선교적 교회(A Missional Church: A Vision for the Sending of the Church in North America)’라는 책을 출판한다. 이 책을 기점으로 하여 북미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선교적 교회론이 부상하며, 서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교적 교회론에 관한 다양한 저술 들이 출판된다. 그 결과 전세계의 많은 복음주의 권의 교회들과 선교단체들이 교회의 선교적 본질 – 교회의 본질은 선교이며 선교는 교회의 핵심적인 가치 – 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므로 20세기 후반부터는 교회와 선교가 연합(Church in Mission)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 론

 

이상과 같이 교회와 선교의 관계가 어떻게 변천되었는지 각 시대별로 고찰해보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교회(모달리티)와 선교(소달리티)의 역사적 역동성, 즉 교회의 선교운동은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처럼 오르락내리락(up and down)하는 굴곡을 그리고 있다. 즉, 교회와 선교는 연합되며 상승하다가(AD 1-3세기 초대교회) 교회는 선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하강한다(AD 4세기 기독교제국). 교회와 수도원 중심의 선교가 조화를 이루며 상승하다가(AD 5-16세기) 교회가 선교를 멀리 하였다(AD 16세기 종교개혁시대). 그러나 다시 교회와 선교회 중심의 선교가 조화를 이루며 상승하다가(AD 17-19세기 위대한 세기) 선교가 교회를 초월하며 하강했다(20세기 전-중반). 그러나 교회를 중심으로 선교가 이루어지며 (20세기 중-후반), 마침내 선교적 교회론이 부상하였다 (20세기 후반 이후). 

결론적으로 본 논문을 통해 역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은, 20세기 말부터 등장한 선교적 교회론은 20세기 초반 영미권 학자들이 제안한 새로운 선교학적 이론도 아니요 선교단체가 살아남기 위해 지역교회를 선교동원하기 위한 자구책도 아니요, 이미 AD 1-3세기 초대교회부터 교회 안에 존재했던 DNA임을 알 수 있다. 즉, 교회와 선교는 초대교회 당시 본질적으로 완벽하게 융합된 불가분의 관계였으나, 각 세기마다 멀어지거나 조화를 이루는 굴곡을 그리면서 변천되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선교적 교회론의 등장과 함께 교회(모달리티)와 선교(소달리티)가 다시 융합을 이루면서, 초대교회의 선교적 DNA를 회복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선교적 교회의 모습으로 회귀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교회(모달리티)와 선교(소달리티)의 융합, 즉 선교적 교회론이란 지역교회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교회의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하여한다는 신학적, 역사학적 그리고 선교학적 당위성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각주

1. 본 논문은 2013년 총신대학원 개혁주의 선교신학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 임을 밝혀둔다.
2.
이재근, “세계기독교학의 부상”,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0호, 2014, 377.
3. 
최동규, “선교적 교회개척의 의미와 신학적 근거”, <선교와 신학> 제28집, 2011, 263-90; 강아람, “선교적교회론의 성경적근거”, <선교신학>, 34집, vol. III, 2013, 12.
4. 
 Ralph D. Winter, ‘The Two Structures of God’s Redemptive Mission’, Perspectives on the World Christian Movement, 4th ed., Ralph D. Winter & Steven C. Hawthorne eds., (Pasadena: William Carrey Library, 2009), 244-253; 한국일, “선교
패러다임의 비교연구: 교회의 선교와 선교회의 선교”, <선교와 신학> 제33집, vol. II, 2013, 242-43
5.
Herbert Kane, A Concise History of the Christian World Mission (Grand Rapids: Baker Book, 1978), 7. 
6. Robert, C. Walton, Chronological and Background Charts of Church History (Seoul: CLC, 1990)
7. 
Winter, ‘The Two Structures of God’s Redemptive Mission’, 244-53.
8. 
로마제국은 무역 뿐만아니라 각 지역에서 발생하는 쿠테타를 신속하게 제압하기 위해서 많은 도로를 건설한다. 그래서 그 유명한 이야기가 탄생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9. 
Stephen Neil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2nd ed. (London: Penguin Books, 1964), 27. 
10. John M. Terry eds., Missiolog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8)
11. 
Kane, A Concise History, 19-20. 
12. 
Neil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39.
13. 
Kenneth S. Latourette, A 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7 vols., vol. I, The First Five Centuries (New York: Harper, 1937-45; rep. ed., Grand Rapids: Zondervan, 1970), 163-69; idem, A History of Christianity (New York: Harper and Row, 1953), 105-08 in Charles Van Engen, God’s Missionary People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2001), 54. 
14. 
Neil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41. 
15. 
Winter, ‘The Two Structures of God’s Redemptive Mission’, 244-53.
16. 
Basil Matthews, Forward Through Ages (New York: Friendship Press, 1960), 50 in Kane, A Concise History, 45; 로마 바티칸의 교황을 수장으로 여기는 라틴어권의 서쪽 지역은 서로마제국을 수립하고 그 수도를 로마로 정한다. 그래서 서로마제국의 교회는 로마카톨릭 교회라 칭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y)을 강조했다. 반면에 헬라어권의 동쪽 지역은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를 수장으로 여기는 동로마제국을 수립하였고 비잔틴제국(Byzantium)이라 불린다. 동로마제국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Humanity)를 강조하며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로 발전된다. 서로마제국은 북쪽으로부터 게르만과 바이킹과 같은 야만족(Barbarian)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범을 당했고, 동로마제국은 이슬람의 사라센 제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였고 마침내 AD 1453년 그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플(현재 터어키의 이스탄불)과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만다 
17. 
북쪽의 스코틀랜드로부터 남쪽 잉글랜드로 진출하던 켈틱 수도사들과 남쪽에서 북쪽으로 진출하던 베네딕트 수도사들 간에 충돌이 발생한다. 
18. 
Paul E. Pierson, The Dynamics of Christian Mission (Pasadena: William Carey International Press, 2009)
19. 
나머지 한 명은 여행 도중에 사망했다.
20. 
사실상 로마카톨릭교회의 프란체스칸 수도승이었던 존 몬테카비노의 중국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이미 몽골제국에서 정착해있던 네스토리안 수도원이었다. 네스토리안 수도원은 자신들을 이단으로 파문시킨 로마카톨릭 교회에게 몽골제국이라는 거대한 교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21. 
원래 50명을 파송했으나 그 중에 32명만 북경에 도착하였다. 프랑스 아비농으로부터 북경까지의 이 여행은 거의 3년이 걸렸다고 한다. 
22. 
Sangeun Kim, Strange Names of God (New York, Peter Lang, 2004), 151; 예수회는 프란체스칸 그리고 도미니칸과 더불어 아프리카, 아시아, 북미 그리고 중남미까지 선교사를 파송한다. 1622년 교황 그레고리 15세는 효과적인 해외선교를 위해 The Sacred Congregation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 이라는 선교회를 설립한다.
23.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방법론은 필자의 논문을 참조하라; 안성호, “17세기초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19세기 제임스레그의 중국유교경전 영어번역본에서 사용된 용어 상제 간의 신학적 연속성”,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2호, 2014; 기타 다음과 같은 책을 참조하라; David E. Mungello, Curious land: Jesuit Accommodation and the Origins of Sinology (Stuttgart: Franz Steiner Verlag Wiesbaden GMBH, 1985), 15; Stephen Neil, “Accommodation” in Concise Dictionary of the Christian World Mission, eds. Stephen Neil, Gerald H. Anderson, and John Goodwill (London: United Society for Christian Literature, 1970), 3-4; George R. Hunsberger, “Accommodation” in Evangelical Dictionary of World Missions, eds. A. Scott Moreau (Grand Rapids: Baker Books, 2000), 31-32.
24.
Andrew C. Ross, A Vision Betrayed; The Jesuits in Japan and China, 1542-1742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94), 40. 
25.
Matteo Ricci, S. J., The True Meaning of the Lord of Heaven, translated by Douglas Lancashire and Peter Hu Kuo-chen (St. Louis: The Institute of Jesuit Resources, 1985), 10. 
26. 
 사서(四書)란 송(宋)나라 시대 저명한 유교학자인 주희 (朱熹: 1130-1200)에 의하여 집대성된 유교의 경전으로써,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그리고 맹자(孟子) 등 네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Michael Nylan, The Five “Confucian” Classics (New He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1); Jost Oliver Zetzsche, The Bible in China (Sankt Augustin: Monumenta Serica Monograph Series XLV, 1999), 20
오경(五經)이란 서한(西漢)시대(B.C. 206-A.D. 8)에 경전으로 집대성된 유교의 경전을 의미하며, 서경(書經), 시경(詩經), 춘추(春秋), 역경(易經), 그리고 예기(禮記)등 5권의 책으로 구성되었다. 오경은 조(周)나라 시대(B.C. 1027-256)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 서경과 시경은 하(夏)나라 (ca. 2183-1752 BC), 상(商)나라 (ca. 1751-1112 BC), 그리고 주(周)나라 (ca. 1122-221 BC)와 같은 중국고대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27.
Geroge Minamiki, S. J., The Chinese Rite Controversy (Chicago: Loyola University Press, 1985); 송영배 “천주실의와 토착화의 의미”, <교우론, 스물다섯 마디 잠언, 기인십편>, 505; 1633년부터 후발주자로 중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도미니칸과 프란체스칸 선교사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Deus 를 上帝와 동일시하는 것과 중국인 신자들의 조상전례를 허용하는 행위를 신성모독 및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로마 바티칸 교황청에 예수회를 고소하면서 조상제사를 금지시키고 Deus대신 천주(天主)를 사용할 것을 요청한다. 그 결과 2세기에 걸쳐서 양측 간에 치열한 중국전례논쟁(Chinese Rites Controversy)이 발생한다.  하지만 교황청은 도미니칸 및 프란체스칸 선교회의 손을 들어준다. 즉, 1704년, 1710년, 1715년 (Clement XI; the bull Ex illa die), 1742년 (Venedict XIV; the bull Ex quo singulari) 교황의 칙령을 통해서 조상전례는 금지되고 용어 上帝는 天主로 대체된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러한 보유론적 선교전략 및 탁월한 서구의 과학기술을 통해서 삼주석(三柱石, Three Pillars: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을 포함한 고위 유교학자계층으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게된다.  마침내 1692년에는 청나라 황제인 강희제(康熙帝)로부터 예수회식 기독교선교의 윤허(Edict of Toleration)를 받기도 했다; 전례논쟁에 관한 상세한 내용과 그 신학적인 배경은 다음의 책을 참조하라. Minamiki, The Chinese Rite Controversy; Mungello, ed., The Chinese Rites Controversy; Its History and Meaning; New Catholic Encyclopedia, 2nd ed. vol. 12 (Washington D. 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Chinese Rites Controversy’
28. 
David Bosch,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NY: Orbis Book, 2008), 244.
29. 
 Ibid., 248; Pierson, The Dynamics of Christian Mission, 147.
30.
Bosch, Transforming Mission, 245.
31. 
James Lewis & William Travis, Religious Traditions of the World (Michigan: Zondervan, 1991), 167.
32. 
Ralph D. Winter, ‘Three Mission Eras’, Perspectives on the World Christian Movement, 4th ed., Ralph D. Winter & Steven C. Hawthorne eds., (Pasadena: William Carrey Library, 2009), pp. 263-278.
33. 
Pierson, The Dynamics of Christian Mission, 201. 
34. 
이 때 케리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다: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35. 
아울러 이 논문에서는 케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도 주장하였다. 첫째, 해외선교를 위해 기도합주회 prayer-concert를 조직할 것, 둘째 1810년 남아공의 케이프 타운에서 전세계선교사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의하였다. 케리의 두 번째 제의는 현실로 실현된다. 로잔세계선교위원회에서는 케리의 제의를 받아들여서 2010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로잔선교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36. 
David Howard, Student Power in World Evangelism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1971), 67.
37.
Kenneth Scott LaTourette, These Sought a Country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50), 46. 
38. 
Kane, A Concise of History of the Christian World Mission,127. 
39. Howard, Student Power, 70. 
40.1960년 중국문화혁명 때 CIM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추방당하면서 중국 인근의 동남아시아로 흩어지게 된다. 이 때부터 CIM은 OMF(Overseas Mission Fellowship)로 이름을 바꾼다.
41. Robert P. Wilder,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Its Origin and Early History (New York: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1935), 9 in Howard, Student Power, 78. 
42. Ruth Rose and Stephen C. Neill, A Histo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1517-1948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7), 328 in Howard, Student Power, 90. 
43. Lewis & Travis, Religious Traditions of the World, 94.
44. Bosch, Transforming Mission, 390; Darrell L. Guder, ‘Missional Theology for a Missionary Church’, Journal for Preachers (Advent 1998), 4.
45. Darrell L. Guder, ‘Missional Theology for a Missionary Church’, Journal for Preachers (Advent 1998), 4. 
46. Gerold Schwarz, ‘Karl Hartenstein 1894-1952, Missions with a Focus on the End’ in Gerald Anderson eds., Mission Legacies (Maryknoll: Orbis Books, 1994), 591-3; MacIlvaine III, ‘What is the Missional Church Movement?’, 96; 박영환
47.
Karl Ha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in Mission zwiszhen Gestem und Morgen, Walter Freytag ed (Sttutgart: Evang. Missions Verbag, 1952), 54
48. 비체돔의 상세한 선교신학은 다음과 같은 그의 저술을 참조하라: Georg F. Vicedom, Missio Dei: Einführung in eine Theologie der Mission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58); idem, The Mission of God: An Introduction to a Theology of Mission, translated by Gilbert A. Thiele and Dennis Hilgendorf (Saint Louis: Concordia, 1965); ‘Willingen-Milestone, Not Terminus’ in Mission Under the Cross, Norman Goodal ed., (NY: Friendship Press, 1953), pp. 9-23. 
49. 호켄다이크의 Missio Dei에 관한 선교신학은 다음과 같은 그의 저술을 참조하라: J. C. Hokendijk, ‘The Call to Evangelism’,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vol. XXXIX, no. 154, (April, 1950), pp. 162-175; idem, Horizon of Hope (Nashville: Tidings, 1970), pp. 28-34; The Church inside Out, trans. Isaac C. Rottenberg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6), 43; ‘Notes on the Meaning of Mission(-anry)’, Planning for Mission, Thomas Wieser ed. (New York: US Conference for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1966), 39; 안승오, “에큐메니칼 신학의 선교주체”, <선교와 신학>, 제33집, vol. II, 2013, 162. 
50. 
박보경, “로잔운동에 나타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 <로잔운동과 선교> 2014, 76. 
51. 
Donald A. McGavran, Understanding Church Growth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 1970)
52. 
Donald A. McGavran, Bridges of God (London: World Dominion Press, 1955)
53. 
최동규, “GOCN의 선교적 교회론과 교회성장학적 평가” <선교와 신학> 제25집, 2010, 231-61; 이후천, “한국에서 선교적 교회의 사례와 그 기준지표에 대한 고찰” <선교와 신학> 제34집, vol. III, 2013, 143-44.
54. 
Darrell L. Guder eds., A Missional Church: A Vision for the Sending of the Church in North America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1998)
55. 
Bosch, Transforming Mission, 390; Darrell L. Guder, ‘Missional Theology for a Missionary Church’, Journal for Preachers (Advent 1998), 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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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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