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교회와 목회자의 정신건강

백신종 목사 (벧엘교회, MD)

 

들어가는 말: 정신건강의 위기

현대 사회의 큰 화두 중의 하나는 정신건강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개인 사회의 형성을 가속화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개인 관계의 약화와 심지어 단절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미 한국은 일인가구 시대를 맞이하며 주거문화와 산업구조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한 고독사의 문제 역시 심심치 않게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현대인이 가진 개인적인 문제가 새로운 면도 있겠지만,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대가족 제도하에서는 가족이나 친족, 사회적인 관계망을 통해서 더 많은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의 단절과 소외는 그런 가능성 마저 차단해 버림으로 정신적인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정신건강의 문제는 지난 2년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판데믹을 지나면서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바이러스 확산에 견줄 만큼 심각한 증상을 일컫는 신조어가 등장했는데 바로 “코로나 블루” (Corona Blue) 이다. 전염병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은 사회적인 단절의 요인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단절을 초래했다. 이제는 정상적인 사람도 사회적인 단절과 실직, 친밀한 인간관계를 통한 삶의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되면서 정신적인 건강에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한 고립감과 우울감은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상적인 스트레스가 되었으며, 여기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밀한 지인을 잃고 애도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민 교회는 오랫동안 정신건강의 도전에 직면해 왔다. 이민사회의 여성들은 사춘기, 임신, 갱년기의 생리적 변화로 인한 만성적인 우울증을 경험하고 있으며, 남성들도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가정과 사회생활의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와 우울한 기질을 경험하고 있다. 문화인류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타문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다소간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민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이 경중간에 우울증을 경험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코로나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민교회 목회자들의 정신건강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시대적, 사회적, 개인적, 문화적인 우울증이 목회자들만의 예외는 아니다. 오랜 기간 함께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의 고통이나 죽음을 맞는 목회자들의 정신건강은 더 크게 위협받고 있다.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한 예배의 중단과 온라인 사역에 대한 과중한 부담, 헌금의 축소와 사역의 단절은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우울감의 원인이 된다.  그런면에서 목회자들의 우울증 문제는 이 시대에 이민교회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할 중요한 정신건강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들의 우울증 문제를 다루어야 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울증의 문제를 다루셨기 때문이다.  신경정신학이나 상담학이 생겨 전문가를 양성하기 이전부터 하나님은 인생의 위기와 도전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죄로 인해서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치료해 주셨다. 열왕기상 19장1절에서 8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짧은 본문을 통해서 엘리야가 경험한 우울증의 원인과 증상을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치료하셨는지 살펴보자.  

 

목회자가 겪는 우울증의 원인

엘리야가 경험한 우울증은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갈멜대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의 도전에 맞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겨루어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증명했습니다. 이 사건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 각성하고 아합과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을 기손 시냇가에서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격노하여 엘리야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엘리야는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두려움에 빠졌다. 모든 백성들이 그의 편에 서서 함께 있고, 무엇보다 살아계신 갈멜 산의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사실 엘리야의 문제는 이세벨이 아니라 그녀의 폭력과 죽음의 위협 가운데 그 자신이 갈멜의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이다. 이 두려움으로 인해 엘리야는 자포자기에 빠지고 절망감과 우울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목회자나 사역자 가운데 큰 사역을 감당하고 나서 위기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목회자의 일탈이 주일 저녁에 가장 많이 일어난다는 보고가 있는가 하면, 큰 사역 이후에 나태해진 틈을 타서 죄의 유혹이 강하게 몰려 온다. 때로는 사역의 강도나 크기에 정비례해서 허무감과 피로감이 몰려오기도 한다. 그래서 큰 사역을 감당하고 무너지기 쉬운 것이다. 이런 현상을 ‘사역후 신드롬’ (post ministry syndrome, PMS) 이라고 부를 수 있다. 목회자는 큰 사역을 감당하고 나서 더 조심해야 한다. 

목회자가 그런 위기를 경험하는 것은 위대한 사역을 감당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의지하지만, 사역 후 개인적인 시간에 그 의존감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때로 하나님이 큰 사역에는 관심이 있지만, 목회자 자신의 개인적인 정서나 감정 문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정신적인 위기는 사실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을 배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허감, 절망감, 두려움에 사로 잡힐 때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주목하고 의지해야 한다. 

문제는 실제 이런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스스로 헤쳐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영적인 원인과 함께 신체적, 관계적, 상황적 요인등 복합한 요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이 문제를 직면하고, 모든 과정을 깊이 이해할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교회에서 함께 이해하고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울증의 증상들

엘리야가 두려움과 절망감에 빠지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왕상 19:3)  그는 큰 일을 감당하고 나서 민첩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과 되어지는 일의 형편을 주목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정신적인 위기에 빠지는 사람들의 특징이 여기에 있다. 상황과 형편을 살피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 사로잡히고 허우적대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일은 베드로 역시 경험했다. 그는 한 밤중에 배를 타고 가다가 갈릴리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만났다 (마 14:22-33). 놀라운 광경을 보고 주님께 “주여 만인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당부한다. 베드로는 주님의 초청에 물위를 걸었다!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잃고 말았다.  마태는 그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갔다”고 기록한다. 상황과 형편에 시선을 두자 주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물에 빠지기 전에 깊은 공포감에 빠져들었다.  베드로 역시 엘리야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엘리야의 선택은 그 상황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었다.  엘리야가 도망간 곳이 어디였는가? 그는 브엘세바 광야에 이르러 사환을 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을 들어갔다. 엘리야는 상황을 피해 도망가면서 자신을 도울 사환과도 떨어지길 원했다. 더이상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이 싫어 아무도 없는 광야로 들어간 것이다. 먹을 식량도 물도 없는 광야에 살기 위해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우울감에 빠신 사람들은 홀로 있고 싶다. 상황과 사람으로부터 도망간다. 그런데 그가 도착하는 지점은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더 가까운 곳에 이르고 만다. 처음에는 살기 위해서 도망했지만, 결국 도착한 곳은 죽음을 직면한 막다른 골목인 것이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죽기를 구한다. 얼마나 모순된 결과인가? 처음에 죽게된 형편을 보고 도망친 엘리야는 분명 살기 원했다. 하지만 이사벨의 군대를 피해 갈 수 있는 곳은 브엘세바 광야였으며, 그곳에서의 생존 가능성 역시 희박했다. 더 이상 살길이 보이지 않았다. 버지니아의 럴레이 동굴 근처에 미로찾기 공원(The Garden Maze at Luray Caverns)이 있다.  키 높이 미로에서 길을 찾아 나오는 방법이 있다. 지도를 가지고 높은 탑에 올라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길로 나가야 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길을 알아야 빠져나올 수 있다. 하지만, 엘리야는 광야에서 길을 잃었다.  그래서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극단적인 죽음을 택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외친 것이다. 

우울증의 또하나의 증상은 바로 열등감이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면서 갑자기 조상들을 언급한다. “나는 내 조상들 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4절) 그가 말한 조상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을 마음에 두고 생각했을 것이다. 성경은 믿음의 조상들 역시 연약함 가운데 때로는 불신하며 인간의 길을 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문제는 엘리야가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한 없는 열등감에 빠져 들었다는 것이다. 사단의 전략과 목표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열등하게 여기고 결국 인격적, 사회적, 신체적, 영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한 사람의 가치와 평가는 스스로의 평가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평가로도 정당하게 매겨질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기준으로 측정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빚은 자녀로 삼으셨다. 불순종과 반역으로 하나님을 버린 백성을 위해서 스스로 만드신 자연법칙을 깨뜨려 기적을 행하시고 구원하신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진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하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신다. 단지 비천한 모습으로 보내신 것만이 아니라, 십자가의 저주와 형벌 아래 피흘리심으로 두려움과 열등감을 빚어낸 모든 죄의 값을 친히 속량해 주셨다. 우리의 가치는 세상과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의 가치와 버금가는 것이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치료법

사단이 공격하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조준하는 바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가치를 깨뜨리는 것이다. 다양한 유혹과 시험을 통해서 스스로 무너져 그 가치를 부인하고 열등감과 우울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그렇게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엘리야에게 보냈다. 천사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엘리야의 위기와 낙심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특별한 종을 보내신 것이다. 이민교회 성도들의 우울증의 문제와 특별히 목회자들의 우울증 문제를 다루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엘리야를 위로하시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엘리야를 위로하셨는가?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주셔서 첫째, 엘리야를 어루만져 주셨다. 열왕기산 19장에 보면 5절과 7절에서 두 번이나 어루만지셨다.천사가 만졌지만 실상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이었다! 하나님은 지금도 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위해서 사람을 보내시고, 상황과 문제를 해결하시고, 천사를 보내어 만져 주신다. 사람이 들어주고, 위로하고, 돕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위로의 손길로 만지고 계심을 깨닫고 인정할 때 깊은 영적인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둘째,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엘리야에게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준비해 주셨다. 광야에서 이제 죽음을 구하는 엘리야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다!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공급해 주신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왜 물과 떡을 함께 주시지 않겠는가? 우울감에 빠졌을 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영원한 생명을 경험해야 합니다. 의지하고 기도하여 물과 떡을 예비해 주시는 손길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면 상한 마음에 위로가 임하고, 생명의 소망이 싹트게 된다. 

셋째,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네가 갈 길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7절). 갈 길을 알지 못해 죽음을 구하는 엘리야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신 것이다. 그 갈 길의 끝은 바로 하나님의 산 호렙이었다. 호렙 산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장소이다. 그 산에 있는 굴에서 엘리야 역시 세미한 소리 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엘리야를 위해서 남겨두신 칠 천의 동역자를 만나게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은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열정과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마치는 말

두려움과 우울감과 열등감에 빠져 헤메던 엘리야는 광야학교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서 더 이상 우울증에 낙심하지 않고, 새로운 사명을 위해서 일어섰다. 어려운 시대에 극복하기 힘든 문제를 만나 우울감에 빠지는 것은 나쁜 일도 잘못된 일도 아니다. 엘리야와 같이 성경의 많은 인물과 같이 우리를 광야학교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회복과 성장을 위한 기회를 주신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소망 없는 그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참된 회복과 더 나은 사명을 감당하길 소원해 본다.